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경제지식] 3저호황 대한민국의 최대 호황

Economy인포

by 빅윌 2024. 1. 14. 13:51

본문

728x90

3저호황이란


석 삼(三), 낮을 저(低), 좋을 호(好), 하물며 (況)
3가지가 낮아 호황을 이루었다.


전 세계 경제의 3가지가 낮아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이 호황을 맞을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두환 집권 후반기인 1986년부터 노태우 정부 집권 초반이 1988년까지 시기에 나타난 경제 흐름으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를 뜻합니다.

 

1) 저유가: 1980년에 석유값이 배럴당 40달러를 찍고 하락, 물가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2) 저금리: 1980년대 한국은 외국 빚이 많았고, 국제금리 하락으로 빚 이자 부담이 줄어들어 국내 경제가 호황을 경험했다.
3) 저달러: 1988년에는 엔/달러 환율이 크게 하락하여 미국 수입업자가 한국을 찾아와 수출이 증가하면서 경제가 회복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초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져 놓은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이에 3저호황이 맞물려 대한민국의 경제적 호황을 거저먹었다는 평가가 있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경제가 상승을 지속했다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에도 3년 연속 11% 이상의 성장을 한 적이 없었지만, 3저 호황 시기에 대한민국은 3년 연속으로 약 11%의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제성장률만으로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성장률이 상승하게 되면 이에 따라 물가도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물가는 너무나도 평안하게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1960년대~198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의 물가는 기본이 10% 상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으면 30%를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실례로 1975년 10월에 30.5%의 물가 상승을 기록했었습니다.

 

3저호황의 배경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과 미국의 지원으로 힘들게 살아남아 산업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무역적자와 일본 기업 독점에 우려를 품은 미국은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의 엔화를 가치 높이고 달러화를 저평가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감소하고, 한국은 원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일본 제품과의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말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한국 경제는 물가 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두 차례의 석유 위기는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를 초래하며, 세계 각국은 중동 산 석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원유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동 산유국은 원유 생산을 늘려 유가를 하락시켰고, 이는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에게는 저유가의 혜택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달러의 불안정을 잡기 위해 금리를 급격히 인상했습니다. 이는 미국에 빚이 많았던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는 석유 위기의 여파가 줄어들고 국제금리가 하락하면서 한국 경제는 저금리로 인한 경기 부양과 함께 회복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단군 이래 최고 호황기

1986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은 저금리, 저유가, 저 달러라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경제적으로 번영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은 연평균 12.1%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국제수지가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고 실업률이 낮아지는 호황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제 번창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태국과 대만 등도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경상수지 흑자와 원화 환율 하락으로 85년 GDP의 59.3%를 차지했던 외채가 1989년에는 GDP의 18.1% 수준으로 급락했습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로 먹고사는 문제가 컸었으나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는 임금 상승으로 구매력을 갖추게 된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이 상승했습니다. 자동차 보급으로 내수시장이 확대되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면서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주식시장도 번영하여 종합주가지수가 85년의 130포인트에서 89년 3월에는 대략 130포인트에서 1000포인트로 7배 넘게 상승하고 주식투자 인구도 20배 넘게 대폭 늘어났습니다.


시장 개방 및 자유무역이 시행되면서 농축 산업 수입 장벽 완화는 농민들에게 일부 불편을 초래했지만, 국가 전체에서는 고도성장으로 인해 국격이 상승하고 일자리가 풍부했습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만 해도 취업이 쉬웠고, 국민의 대다수가 중산층으로 생각했으며 소득분배도 괜찮은 수준이었습니다.

현재와는 다르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차이가 크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3저호황이지만 어려움은 있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은 저금리, 저유가, 저 달러 등 이상적인 조건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근로자들이 천국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노동시간은 평균 3,000시간에 육박했고,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조 가입률이 일시적으로 증가했지만, 노조를 결성한 계층은 야당 지지층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여전히 노조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노동조건에 대한 냉담한 논조는 여전했습니다.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크게 상승했지만, 근로환경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고물가와 함께 체감 임금 상승률이 기대만큼 높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 시기의 선거 결과를 보면, 경제 성장률이 높았음에도 민정당의 득표율이 30%대에 그쳤습니다. 이는 당시 유권자 중 젊은 층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감축은 1989년부터 야 3당 합의로 시작되었고, 1990년대 초에는 주 44시간 노동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전반기에는 경제성장률이 일시적으로 6%로 감소하면서 1시간 더하기 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1988년의 노동시간이 2,900시간이었던 것이 1990년대에는 2,500~2,600시간으로 감소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면, 호황 시기에도 근로자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었고, 노동환경의 개선은 더 많은 사회운동과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노동환경 개선은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3저호황 후 대한민국

1986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은 최대 호황기로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높은 성장의 이면에는 박정희 정부부터 이어진 불합리한 경제 구조와 금융체계의 부실함이 존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과도한 투자로 인한 국제수지 악화와 관치금융이라 불리는 금융체계의 취약성이 드러났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 경제의 퇴조와 국내적인 이슈로 원화 절상, 통상압력, 과잉투자 등이 발생하면서 호황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소득은 4천불, 소비수준은 2만불"이라는 카피를 내세운 과소비 추방 공익광고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에는 소득수준이 5천불, 소비수준이 2만불로 상승하면서 경제는 빠른 성장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호황은 박정희 시대부터 이어진 경제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환 위기를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외환 위기는 국내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 경영과 단기 외채로 인해 발생했습니다. 3저호황 이후 꾸준한 무역수지 적자와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수출이 어려워지면서 국내 경제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한국은 외환 위기 당시 김영삼 정부가 세계 금융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외환 위기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 결과, 1997년에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희생과 구조조정을 이뤄내었지만, 그로 인해 대기업의 외국 자본 흡수와 일부 기업의 파탄 등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외환 위기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고 여전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했습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